[나럄] 수 천개의 호박 파이

높고 오래된 제미니 산은 많은 걸 품을 줄 알았다.

작은 새의 지저귐, 나이를 두껍게 머금은 사슴 뿔, 해가 들지 않는 곳의 여린 잎과 햇빛 듬뿍 머금어 단단히 굳어진 나무껍질. 그 사이에 숨은 몇백년의 나이테.

오래된 식물들이 비벼내는 소리 사이론 동물 길이 났다. 다람쥐는 나무에 길을 남겼고, 사슴은 간격이 긴 길을 남겼다. 사람의 눈으론 찾을 수 없는 하늘의 길, 생명이 모여드는 물을 따라 생긴 길. 사람의 기도 소리가 아닌 것들의 소리가 가득찬 길.

그러한 것들은 으레 비밀을 같이 품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산에 들어가선 안된다 이야기하곤 했다. 길을 잃게 만들어 사람들을 품는 제미니 산의 깊은 숲에 대해 몰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을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자색 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인간이 발자국을 새길 수 있는 건 보랏빛 이파리가 시작되는 산의 초입부까지라고 몇 번이고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리아, 제미니 산엔 아무도 살지 않아. 그건 그냥 꿈이란다. 게다가 그 산이 아니더라도 라즈베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잖니? 그 산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단다.‘

조금만 들어가면 동생들이 좋아하는 라즈베리가 한 가득 있을텐데도, 어른들은 그 곳에 들어가면 뭔지 모를 존재에 홀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 이야기 했다. 가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리아에겐 두 번, 세 번 더 당부했다.

- … 하지만 꿈 속에선 보랏빛이 아니라 노란색 꽃이 가득한 따뜻한 곳이였는데. 뭐, 꿈은 꿈이니까.

나리아는 툴툴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꿈을 가끔 현실처럼 헷갈려한다 해도, 보라색과 노란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어른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았다.

다정한 어머니와 아버지, 네 명의 동생.
가난하지만 작고 따뜻한 우리 마을.

아침에 얻은 계란으로 만든 완벽한 아침 식사.
산의 고요한 소리를 그대로 실어다주는 선선한 바람.
내일 밤에 열릴 마을의 작은 축제.
축제에서 다같이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라즈베리.

에이, 내가 굳이 그 깜깜한 산에 왜 가겠어.

‘ … 네에, 안 갈게요. 난 우리 집이 좋은걸요! ’

… 라고 말했었는데.
내가 그 보랏빛 길에 들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었는데.

나리아는 보랏빛 이파리로 가득한 어두운 길에서 숨을 골랐다.

‘난 이제 엄마아빠한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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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아로서도 나름 변명할 거린 있었다.

자.
그러니까,
… 변명할 말을 확실히 떠올리기 전에 우선 피가 흐르는 팔을 대충 동여맸다. 그리고 동생들의 손을 잡았다.

제미니들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리아는 심부름을 나갔다가 작은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왔다.
동생들은 나리아가 어렸을 적에 그랬듯 나무를 오르내리며 놀았다.
큰 신수가 위치한 마을 중앙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어른들이 나무와 나무를 밝은 등불로 이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산은 고요했다.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선 남자 어른들이 돌아오는 기념으로 축제가 열릴 예정이였다.

큰 나무에 작은 등불들이 달려 반짝반짝 빛났고, 그 아래에선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소리와 배고파지는 음식 냄새로 온 마을이 행복했다.
이제 레테의 물은 안전하다고 했고 어른들은 무사히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나리아는 평소처럼 아이들과 나무를 타고 놀았다. 다 된 음식에 나뭇잎을 떨어뜨려 혼나기도했다.

예정대로라면 나리아와 친구들은 나무 아래에서 돌아오는 어른들을 맞이하고, 노랠 부르고, 밥을 먹었어야 했는데…





귀에서 쇠가 절걱이는 소리가 들이박혔다.
마을의 어른들 대신 처음보는 사람들이 검을 들고 들이닥쳤다.

처음 듣는 비명 소리 사이에서 므네모시네의 강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칼들이 맞닿는 소리와 동시에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동생들의 손을 잡았고,
‘초입으로 도망가 숨으면 될테다. 저 사람들도 제미니 산 무서울 줄은 알고 있을테니 더이상 쫓아오지 않겠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뛰었다.



그리고 제미니들을 쫓은 몇 명의 병사들은 보랏빛 숲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칼을 휘두르며 쫓아왔다.

‘흰 머리.ᐟ.ᐟ.ᐟ.ᐟ 흰 머리의 소녀가 저기 있다.ᐟ.ᐟ.ᐟ‘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무언가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 ‘이건 꿈이 아닌건가?’, 나를 찾는 걸까? ,
팔이 아픈걸까, 다리가 아픈걸까, 종잡을 수 없는 통증이 삽시간에 쏟아지자 잠시간의 기억이 깜빡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보랏빛 숲의 중간이였고,
글쎄.. 마을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콸콸 흘러 넘치던 생각이 멎었다. 우리는 도망친거구, 저 사람들은 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단말이에요! 하는 변명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멍한 생각을 했다.

아니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자아, 누나가 달려나가면 너희는 이 바위 뒤에서 절대 나오면 안돼. 이건 숨바꼭질인데, 술래가 쪼끔 많아.”

동생들을 깊은 바위 뒷쪽에 숨겼다. 그리고 검은 외투를 벗어 동생들 위에 덮어주었다.

“누나…”

“그리고 너희는 1000까지 세는거야. 100까지 세는 법은 배웠지? 그걸 열번만 더 세면 돼. 번갈아가면서 세. …누나는 어른들을 불러올게. 저 술래들 다 혼내달라구 어른들 데려올게.”

“누나, 팔에서 피가 나.”

‘에구. 술래한테 들킬 뻔했네. 고마워.’

나리아는 씩 웃으며 치맛단을 찢어 천으로 제 팔의 상처를 동여맸다.
동생들에게 떨리는 손을 들킬세라 확실히 힘주어 팔을 묶었다. 언제나의 나리아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검은 천 위로 동생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자, 누나가 엄마 모셔올테니까 여기서 천천히 1000까지만 세는거야. 알았지?”

그리고 동생들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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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미니 산에는 사람들을 깊은 곳으로 데려가 죽이는 자색 길이 있다고 했다.

- 그 곳으로 병사들을 보내버리면, 안전해질거야.

나리아는 자색길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고 달렸는데.

자색 길은 모르겠고, 사람은 있었다.
숲은 너무 어두웠고, 사람들이 쫓아오는 소리만 들렸다. 정신이 없었다. 나리아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그 사람의 눈이 호박색이라는 것과…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만 파악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이유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마을을 향해 달리던 나리아는 기겁하며 그 사람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미쳤어요? 저기 칼든 사람들 쫓아오는 거 안 보여요?!”

“....? 이지스 산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걸 모르나?”

질문에 질문을 내놓은 호박색 눈의 남자가 나리아를 따라 달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이 표정 어디서 본 적 있는데.

그래, 이런 숲에서 길을 잃을 정도면 우리 마을에 살았었나보지. 멀쩡하게 여기 들어와있네. 바본가보다. 나리아는 친절히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지스 산은 옛날 이름이고요, 므네모시네.. 므네모시네 강이랑 흰 머리를.. 찾는다고 했어.
근데 우리 마을엔 레테 강 밖에 없단 말이에요, 여튼, 마을이 불타고 있어요. 당장 구해야해.”

손을 더 세게 쥔 채 달리기 시작했다.

“흰 머리?”

남자의 시선이 나리아의 머리에 와 닿았다.

“네! 그러니까 지금 일단-”

뛰어야한다구요,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남자가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나리아는 어느 순간 새까만 비늘과 반짝이는 호박색 눈을 마주치고 얼어붙었다.

“... 죽었니?”

검은 드래곤이 거대한 코 끝으로 나리아를 툭 치자,
나리아는 그 자리에서 톡 쓰러져 기절했다.